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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것이 왜 고통스러운가요?>

<생각하는 것이 왜 고통스러운가요?>(데이비드 로텐버그 지음, 박준식 옮김, 낮은산 펴냄).

출처: 프레시안 2012.01.27

노르웨이의 철학자 아르네 네스(Arne Dekke Eide Næss, 1912~2009년)는 근대적 세계관이 파생시킨 보편적 문제로 이러한 사안들을 바라본다. 그는 생태 환경 보존 운동을 개별적으로 바라보지 말고, "하나의 전체로 보는 폭넓은 경험" 속에서 사유하자고 제안한다. 그가 말하는 것은 '생태학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철학에 관해 이야기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야만, 근본적인 전환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아르네 네스는 한국 사회에 본격적으로 소개된 바 없는 철학자이다. 그는 27세의 나이로 노르웨이 최연소 정교수가 된 재능 있는 철학자였다. 하지만, 종신직 교수를 버리고 노르웨이 할링스카르베라는 산 위에 트베르가스타인으로 명명되는 조그만 오두막에 자신을 유폐시킨 이단아였다.

현재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에 교수로 재직 중인 박노자가 그의 이름을 가끔 인용해 한국에 알렸지만, 그의 철학적 비전을 본격적으로 접할 기회는 없었다. 이번에 번역 출간된 <생각하는 것이 왜 고통스러운가?>(박준식 옮김, 낮은산 펴냄)는 이 독특한 철학자의 이력과 사상을 심층적인 대담 형식으로 풀어낸 흥미로운 책이다.

이 책은 뉴저지 공과 대학 인문학부 조교수 데이비드 로텐버그가 오랜 시간 아르네 네스와 만나 나눈 대화를 정리해 출간한 것이다. 대화의 기록이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철학자의 엄밀성이 가미되어 만만치 않은 깊이를 발산한다. 책의 기묘한 분위기로 인해 때로는 자서전을 읽는 듯한 느낌에 젖어들다가도, 생태주의 운동 지침서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사유의 단초를 자극하는 심오한 화두를 담고 있는 철학서를 대하는 기분에 빠져들기도 한다.

특히, 제7장의 ''깊이'를 정의하기'는 '심층 생태론'에 대한 철학적 질문들이 쏟아져 나오고, 이에 대한 치열한 공박이 이뤄지고 있어 이론적으로도 흥미롭다. 제8장 '새로운 눈으로 세상 보기'도 게슈탈트(gestalt) 개념을 둘러싼 아르네 네스와 대담자 데이비드 로텐버그의 논쟁이 팽팽한 긴장 속에 펼쳐진다. 이 부분은 철학적 화두를 둘러싸고 이뤄지는 두 사람의 대화가 학문적 진전으로 화합하기 보다는, 화해되지 않는 모호성으로 남아 있다. 그래서 오히려 읽는 이의 사유를 자극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그렇다면, 재능 있는 철학자 아르네 네스는 어떤 도정을 거쳐 심층 생태론의 창시자가 되었을까? 아르네 네스의 사유는 20세기 유럽사를 가로 지르는 정신적 모험의 산물이다. 그는 노르웨이의 부유한 가정인 베르겐 가의 네 아이 중 막내로 태어나 성장했다. 그는 오스트리아와 미국에서 1930년대 서구 지성사의 핵심적 쟁점이었던 논리 실증주의, 정신 분석학, 행동주의 심리학 등에 빠져들었다. 20대에는 오스트리아 비엔나 서클의 학자들 사이에서 논리 실증주의 세미나에 참여했고, 그곳에서 정신 분석에 매료되어 철학자의 입장에서 정신병원 환자를 관찰하기도 했다. 이때의 경험을 아르네 네스는 다음과 같은 절절한 언어로 표현해냈다.

저는 정신과 의사가 되는 것을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그 세계를 보여 준 모든 이들에게는 감사했습니다. 훗날 오슬로 대학교 학생들에게 삶의 의미에 대해 강연을 한 적이 있습니다. 무척 많은 젊은이들이 인류가 진정한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말했습니다. "매우 쉽습니다. 그냥 앉아 있으세요.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과 함께 앉아 있으세요." 조금만 공감할 수 있다면 엄청나게 간단한 일입니다. 교도소나 병원에 가세요. 그 비명소리들을 듣고 난 뒤 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105쪽)

아르네 네스는 비엔나를 떠나, 1938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캠퍼스의 심리학과에서 동물 행동주의를 연구한 것이다. 그는 '쥐의 생태'를 연구하면서, 다른 존재를 통해 인간이라는 존재를 객관화하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모든 생명체가 공유하고 있는 삶의 측면, 생명의 보편성을 보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당당하게 "저는 플라톤에게서 배운 것만큼이나 쥐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는 독일에 대항하는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했고, 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독일군에 부역해 고문을 행한 자들과 고문 피해자의 가족들을 면담하는 역할 수행했다. 그리고 유네스코의 요청으로 '민주주의의 의미에 관한 연구' 작업에 몰두하기도 했다.

그는 간디와 레이첼 카슨의 영향으로 심층 생태론을 창시했다. 심층 생태론(deep ecology)은 자연의 일부로 인간의 존재를 파악함으로써 "인간 운명의 불가피성을 수용"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생명체에 인간과 동등한 지위를 부여하려는 철학적 노력이 심층 생태론에는 기입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생태계의 일부임을 인식함으로써 세계의 지속 가능성을 발견하는 철학적 사유의 소산이다. 또한, 생태학(ecology)과 철학(philosophy)을 결합한 생태 지혜(eosophy)를 통해 "전 세계에 걸쳐 사회와 문화 구조 안에서 환경 문제의 근본적인 뿌리를 찾는 것"이기도 하다.

아르네 네스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지리산 케이블카 설치는 '자연을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수단'으로 보는 파편화된 세계 인식이다. '인간이 아닌 생명체들도 고유의 가치'를 갖고 있다는 인식론적 전환이 이뤄지지 않는 한, 이런 폭력적 행위는 지속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아르네 네스는 "인류가 자신의 행복보다 더 많은 것을 생각하는 지속 가능한 세계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를 기획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근대화 과정이 자연에 대한 폭력이었고, 자연에 대한 의존성을 줄이는 것이었다면, 심층 생태론은 '세계와의 연관 속에서 자신의 긍정적 비전을 생사하는 능력을 고취하려는 노력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아르네 네스가 제시하는 '심층 생태론의 8대 강령'은 만만치 않은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함께 깊이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기에, 그 강령을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심층 생태론의 8대 강령

1. 인간과 인간이 아닌 생명체들의 번영은 그 자체로 고유의 가치를 갖는다. 인간이 아닌 생명체들의 가치는 인간에게 유용한가의 여부와는 별개이다.

2. 지구상 생명 형태들의 풍요로움과 다양성은 고유한 가치를 가진다. 인간의 문화 형태도 여기에 포함된다.

3. 인간은 생명 유지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러한 풍요로움과 다양성을 감소시킬 어떠한 권리도 가지고 있지 않다.

4. 인간 생활과 문화의 번영은 인구가 상당히 줄어들 때에만 이룰 수 있다.

5. 현재 인간이 비인간 세계에 하고 있는 간섭은 과도하며 이러한 상황은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

6. 이상의 강령들은 지금까지 인간이 지구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 보여 왔던 지배적인 행동 방식을 반드시 변화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그러한 변화는 정치적·사회적·기술적·경제적·이데올로기적 구조에 근본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다.

7. 부자 나라들의 사상적 변화는 생활의 물질적 기준을 높이기보다는 삶의 질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주가 될 테며 이를 통해 생태적으로 지속 가능한 개발을 위한 지구적 상태가 준비될 것이다.

8. 이상의 강령에 동의하는 이들은 필요한 변화들이 일어날 수 있도록 비폭력적인 수단을 통해 직·간접적으로 노력해야 할 의무가 있다. (265~266쪽)

 

/오창은 중앙대학교 교수

by 우듬지 | 2012/01/28 14:54 | 서평 | 트랙백 | 덧글(0)

예술과 비평에 관하여

예술과 비평에 관하여

* “회화는 조각, 판화 또는 모든 다른 예술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언어이며, 그것은 언어에 대한 지능을 가진 사람이라면 우구나 이해하고 말할 수 있다. (……) 작품이 말하길 바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은 그리는 법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 해방의 수단이 될 것이다. 그것은 책에 바탕을 두고 지능의 평등을 입증하는 것과 정확히 등가적이다. (……) 그러나 위대한 화가를 만드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해방된 자를 만들어 내는 것, 그래, 나도 화가라고 말할 수 있는 인간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 그래, 나도 화가다, 나에게도 영혼이 있다, 나에게도 나와 비슷한 자들과 소통할 느낌이 있다는 뜻이다.” (J. Ranci'ere, <무지한 스승>, 궁리, 2008, pp 131~132.)

랑시에르는 경험을 기반으로 세계를 배운다는 점에서 우리 모두 평등한 ‘지적 능력의 소유자’라고 주장한다. 다만 그 능력을 어디에 쓸 것인지는 자신이 결정하는 문제다.

* 부르디외의 예술의 목적은 “보이는 것, 감각적인 것, 일상의 구체적인 것 속에서 포착될 수 있는 사회적 ‘현실’을 재건하는 것”이다. (P. Bourdieu, <예술의 규칙>, 동문선, 1999. p.13)

이는 사회의 여타 장에서는 가능하지 않는 일, 즉 일상생활의 차원을 넘어서서, 예술은 ‘현실을 다시 만들어내는’ 크고 중요한 일을 지향하고, 나아가 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미술비평은 ‘사회적 현존의 재건’을 위해, 창작과 수용 사이, 우리에게 나 있는 “쌍방통행로”라 정의한다. 때로는 작품의 의미 해석이나 ‘이론적 분석’을 하지만, 때로는 ‘생산적 비판’이나 ‘창조적 파괴를 위한 논쟁’같은 거친 담론도 생산해내어 미술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려 하기 때문이다.
* 예술비평의 중심은 ‘글쓰기’다. 그리고 이 특수한 영역에서는, 글쓰기에 선행하여 ‘예술작품(전시)에 대한 감각적, 인식적 경험과 사유’가 필요하다. 당연히 작품을 경험하고, 그에 대한 거리두기 속에서 자신의 사고력을 통해 얻은/구성한 내용이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예술에 대한 글쓰기를 시작할 수 있다.

  “착상이 떠오를 때 그것을 적는 일을 침착하게 주저하면 할수록 그 착상은 그만큼 더 잘 익어서 품에 들어올 것이다. 말은 생각을 정복하지만 글은 그 생각을 지배한다.”(발터 벤야민 선집 1: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 길, 2007, p99)
벤야민의 언급처럼 글쓰기(비평)는 절대적 시간, 사유의 숙성, 말보다 더 강하게 생각을 지배하는 글의 힘을 믿으면서 써야 하는데, 오늘날의 비평은 신속성, 정보성, 대중성이 우선시된다. 이런 이유로 비평은 깊은 사유, 의미의 통찰, 독창적 글쓰기가 불가능하고, 그런 비평은 시대에 맞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저널의 시간, 비평의 시간, 예술창작의 시간은 각기 다르다. 저널이 새로운 소식의 전파자라면, 비평은 ‘관찰과 비판적 정신의 산물’이다. 그래서 전자가 정보를 다룬다면, 후자는 ‘감각적/인식적 사유의 내용’을 산출한다. 그런데 후자가 전자의 속성을 닮아가기 시작한 것은 작품보다 전시 위주로 미술계가 작동한 1990년대부터라고 가늠할 수 있다. 이런 대표적인 현상은 비평가들의 글이 ‘전시(이벤트)’에 대한 프리뷰(preview), 리뷰(review) 위주로 생산된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비평가들은 長文보다는 短文 혹은 ‘기사 아닌 기사’를 쓴다.
대중 미디어(저널)와 비평의 긴밀한 협조 관계는 어떤 문제를 노정(露呈)하는가. 첫째, 저널리즘과 시각예술 비평의 공조는 서로에 대한 양해와 인정 속에서 주류미술/비주류미술을 고착화시킨다. 둘째는 예술비평의 덕목이자 존재 이유인 ‘논쟁적 담론 생산’이 위축된다는 것이다. 셋째는 미학의 지적 성과이든 비평의 담론이든 논쟁적 생산물이 나오기 어려운 구조는 불가피하게 ‘독자의 게으름이나 외면’을 발생시킨다는 점이다.

저널리즘과 비평의 동질화 상황에서 미술비평이 저널에 발표하는 주요 형식은 전시 프리뷰나 리뷰다. 그런데 비평은 개별 사안에 대한 프리뷰나 리뷰를 포괄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비평이 아니다. 비평은 큰 의미에서 앞으로 올 것을 현재에서 미리 보는 동시에 과거에 있었던 것을 현재에서 다시 보는 종합적 시각의 언어적 구체화다. 또 글쓰기라는 몸과 정신의 실천이라는 것이다.

2012.01.17

 

by 우듬지 | 2012/01/22 19:08 | 雜文(내글) | 트랙백 | 덧글(0)

영도(零度)의 미술 , 김영민(한신대 교수)

영도(零度)의 미술 (김영민)

1. 오늘날의 미술은 진지(眞摯)한가? 그러니까, 궁극적 이미지나 어휘[眞]에 다가서려는[摯] 긴장으로 인해 항상 그 몸을 떠는가? 혹은 ‘영혼’이나 ‘가치’라는, 유현하지만 흐릿한 말에 수반되는 정서에 대한 반응처럼, 그것은 미소섬세하지만 필설을 희롱하는 채로 여전히 진지한가? 혹은 그것조차 아니라면, 사무라이들이 즐겼던 칼의 미학에서처럼 ‘진지’하게(眞劍に), “몸을 가르는 솜씨, 정말 일품입니다.”(吉川英治, <宮本武藏>)라고, 라도 말할 수 있을 텐가?

물론 사적 감상의 장소 속에서 쉴 새 없이 만나는 감동과 긴장과 그 진지함을 재론할 필요가 있겠는가? 어떤 존재(들)의 가치를 뜻대로 희석시키거나 때론 삭제하는 것, 아니, 심지어 존재를 비존재로 투영하는 것, 바로 그것이 그 모든 미래적 진지함이 얹힐 미디어-정치의 보편적 토대가 아닌가? 누구든 제 멋대로 감동하고 제 깜냥껏 진지할 수 있을 테다. 하지만, 감상의 주관적 ‘장소’는 공론장에서 외떨어져 사사화하거나, 그 진지함은 하찮게 여겨질 뿐이다. 문제는, 그리고 문제가 있는 곳은 너와 내가 소통하는 ‘장소’가 아니라 전시가치(Ausstellungswert)와 교환가치(Wechselwert)가 지배하는 객관적 ‘공간’이다. 미술의 세계가 장소가 아닌 공간이라는 사실을 피할 수 없다면, (니체식으로 말해서) 우리는 ‘어째서 그것이 공간이어야 한다고 믿는 일이 발생했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혹은 이와 비슷하게, 주관적으로 구성되는 개인의 감상이 카타르시스의 보상을 준다는 사실을 잠시 잊은 채 (푸코처럼 말해서) 왜-어떻게 이같은 공간적 형식이 인식의 틀을 만들어 내는지를 물어야 한다.

이 객관적 공간이 돈판[豚幻]이라는 사실은 ‘감상의 소비자적 주체’일 뿐인 서민들에게는 쉽게 포착되지 않는다. 세속의 체계는 이런 맹점이 주축을 이루어 잘 굴러가는 법이다. 그러나 기원을 쫓는 계보학적 조망에 의해 풍경의 조화가 일거에 무너지듯이, 감상의 낭만에 얹힌 일반자로서의 개인이 자신의 ‘자리’를 묻는 바로 그 순간, 구조와 교환의 고리는 그 꼬리---돼지[豚] 허깨비(幻)의 꼬리---를 밟힌다. 그러나 밟힌 꼬리도 (이를테면) 꼬리탕으로 쓰이고, 비록 돈판이라도 그 판(champ)은 유용하다는 게 실은 우리 모두가 당면한 문제다. 다시 푸코식으로 말하자면, 자기의 테크놀로지는 지배의 테크놀로지에 이미 ‘동의’한 채로 구성되었고---혹은, 자기실현의 테크놀로지는 투기(投企)의 테크놀로지에 빚지며---동의/동화의 맛은 쓰지 않(bitter-sweet)을 뿐 아니라 유익하며 또한 생산적이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것이 공간이어야 하는지’, 그리고 ‘왜, 어떻게 이같은 공간적 형식이 인식의 틀을 만들어 내는지’를 묻는 일은, 이 글의 관심 속에서는 ‘영혼의 형식으로서의 진지함’의 변천사를 추적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것은 오직 자본만이 진지한 세속을, 종교와 사랑, 그리고 미술까지도 돈판[豚幻]의 진지함에 의해 항용 수혈을 받아야만 연명할 수 있는 병자들의 세속을 발본적으로 다시 묻는 일이다. 미술이 자본의 수혈을 받아 환골탈태하고, 치부의 소재가 되거나 ceo의 관심거리가 된 일은 진지함의 역사에서 어떻게 자리매김되는가, 혹은 인류의 정신문화적 표현이 그 영혼의 진지함과 맺는 관계의 역사 속에서 작품의 장소들이 경매와 투기의 공간 속으로 등질화되는 자본의 권력의지는 어디를 지향하는가, 하는 등의 물음은 미술의 미래와 더불어 인류의 미래를 보살피려는 노력에서 반드시 보살펴야 할 알짬이 아닐 수 없다.

자본이 행사하고 구성하는 진지함의 공간 속에서, 인간다운, 인간을 위한, 그리고 인간만의 진지함의 현실과 가능성은 대체 무엇일까? 나는 이를 예/미술의 출발로서 ‘놀이’가 갖는 진지함의 이중성을 통해 잠시 궁리해보고자 한다. 놀이 이론가들의 한결같은 주장은 그 모의성(模擬性), 즉 본뜨고 흉내내는 것, 마치 그런 척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놀이 혹은 창작이 진지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은 착각이다. 더 나아가서, 이 착각은 진지함이라는 개념의 역사적 연속성을 가정한 채로, 놀이가 게임으로 창작이 프로젝트로 변해버린 자본의 세속 속에서 진지함의 개념이 겪은 불연속적 변화를 놓친 탓이기도 하다. 요지는, 놀이나 자기표현의 (비)진지함에 대한 오해 혹은 착각은 인류의 가치체계를 전일적으로 규제·재구성하고 있는 자본의 스크린/프리즘에 의한 착시효과에 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진지함의 성분이 자본에 의해 착색·변질된 터에 (개념적 연속성의 착각에 의해) 되돌아 보는 놀이와 창작의 진지함에 대한 평가는 당연히 도착적(倒錯的)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자본만이 그 모든 세속적 진지함의 알파와 오메가가 되어버린 지금에도, (특히 어린 아이들의 무심하고 진지한 동정動靜과 어울림에서 생생하게 엿볼 수 있듯이) 사소한 놀이와 일없는 창작의 열정 속에는 인류가 지녔던 진지함의 원형적 모습이 부사적으로(adverbially) 번득이고 있다. 그 원형은 잘라 말해서 ‘진지하지 않음 속의 진지함’이라 할 수 있는 태도인데, 이것은 ‘진지함 속의 진지하지 않음‘이라는 자본제적 체계 속의 미술(예술)과 대조적으로 주목할만하다. 후자가 진지함의 본치를 띠긴 하지만 그 진지함은 필경 자본과 연동된 교환가치일 뿐으로, '그 자체로(per se)', 혹은 스스로의 쾌락을 위해 작동하는 무상(無償)의 것이 아니다. ’돈으로 처 발랐다!‘는 시쳇말처럼 자본의 네트워크에 얹혀 있는 미술의 속은 텅 빈 것인데, 그 진지함은 차라리 그 빈 속을 감추려는 가상(Schein)에 불과하다. 이에 비하면, 어린 아이들의 놀이 속에서 생동감있게 포착되는 진지함의 태도는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속속들이 진지한 것‘인데, 그것은 그 자체로, 스스로의 쾌락을 향해 작동하며 오직 무상의 즐거움으로써 그 무상을 보상한다. 미술의 허세를 제겨내고 그 진지하지 못한 진지함을 새로운 진지함으로 채울 수 있으려면 ’사소한 놀이와 일없는 창작의 열정‘을 되찾아야 하며, 정녕 이것은 “삶을 어떤 미학적 가치를 지닌, 어떤 양식에 부합하는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려는 신중하고 자발적 실천”(M. 푸코)보다도 앞서는 일이다.

2. 오늘날의 미술은 유능한가? 그 유능의 성격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떤 제도와 담론에 얹혀 유지되거나 재생산되고 있고, 또 어떤 행로를 그리고 있는가? 미술의 유능과 무능을 따지는 노릇은 잠시 밀쳐두더라도, 논의를 현실화시키려는 마당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앞서 말한 ‘진지하지 않음을 감추는 진지함’의 외양으로 포장한 미술은 자본주의적 유능을 향해 제 깜냥껏 줄달음을 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미술의 유능은, 그 별스런 방식 탓에 따로 특화해서 논의할만한 것이긴 하지만 단지 미술만의 것은 아니다. 그 유능은 우선 이 시대의 제도에 의해 규제당하는 종류의 것이다. 투신할 몸[身]이 없는 제도는 투기할 수밖에 없고, 그 투기의 당연한 댓가로서 요구하는 유능은 창작자의 단독자적 열정과 진지함을 삭제하는 방식을 통해 일구어지는데, 예를 들어 이 경우의 주체화란 창작자를 제도적으로 규정하기 위해 선별하고 장치하는 여러 형식들의 네트워크에 지나지 않는다. ‘섹스는 애초에 젠더였다’(J. 버틀러)는 말처럼, 창작자의 열정은 어떤 역사적 기원 속에서 발견되고 기술(記述)될 수 있을 실재가 아니라 자본제적 유능을 향해 줄달음치고 있는 제도와 그 형식에 의해 거꾸로, 사후적으로 재구성된 추상인 것이다.

아감벤의 지적처럼 자본제적 삶의 현실 속에서 탈주체화와 주체화가 서로 짝패처럼 어울릴 뿐이며, 개인의 개성과 취향을 통한 변화는 한갓 체계의 (비)운동성에 대한 알리바이로 되먹힐 때, 창작자의 열정이 체계의 추상(抽象)과 실질적으로 구분되지 않는 일은 차라리 자연스럽다. 마찬가지로 미술이 여러 제도적 형식들에 의해 규제당하고 자본제적 코드에 얹혀 일차원적 실용에 재편입되는 현실은 도착적이지만, 다시 그것은, 그 모든 도착(倒錯)을 자연스럽게 먹어치울 수 있는 체계에 의해 자연화된다. 이윽고, 도착과 자연의 야누스로 합체된 체계의 총체성만이 진정으로 도착적인데, 그 도착성을 극적으로 심화시키는 것은 바로 그것이 자연스럽게 여겨진다는 사실에 있다.

미술이 어떤 도착을 통해 ‘유능의 보수주의’로 귀착할 때, 내가 제시할 수 있는 오래된 대답은 ‘무능의 급진성’1)이다. 유능이 사회적 동화의 과정을 통해 그 단독성과 자발성을 잠식시키는 기성의 생산성이라면 무능은 다른 생산성, 다른 장소, 그리고 다른 의욕(‘하아얀 의욕’)을 가리킨다. 내가 제안하는 21세기의 정신문화적 시공간은 “자본주의적 체계와 자발적, 창의적으로 불화하려는 인문-종교-예술의 소수자/남은 자 연대가 ‘지는 싸움’의 본격적인 형식을 구체화하면서 생활의 양식 속으로 근기있게 내려앉혀야 할 시기”(동무론457)이기 때문이다. 자본의 진지함에 얹혀 바로 그 자본의 유능 속에 기식하려는 오늘날의 미술이 되찾아야 할 것은 무능(無能)이며, 오직 그 무능 속에서야 열리는 급진성의 지평이다.

3. 오늘날의 미술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그리고 그 존재는 실로 얼마나 ‘있는’가? 수없이 다양하게 ‘있는’ 것들 중에서, 미술은, 그리고 그 미술을 (잠시라도) 존재하게 만드는 미술적 체험은. 대체 어떻게 ‘있는’가? 하지만 우리 시대에 미술의 존재감이 다분히 선택적으로 과장되었다는 사실보다 더 분명한 게 있을까? 예를 들어 미술품 앞에 어정거리면서 분방한 시선을 던지는 관객의 존재감은 대체 자기 스스로에게조차 분명한 적이 있는가? 그 시선의 황망한 분열 속에서 없는 듯 변덕스럽게 있는 관객의 존재감은 있는 듯 허망하게 없는 미술품의 존재와 어떻게 내통하는가? 만일 자본의 폐쇄적 자전(自轉)에 의해 기계적으로 배치된 개인-소비자의 좌표를 추후적으로 합리화하지 못한다면 관객의 존재감과 그 지위는 누가 결정하며 대체 어떻게 유지될 수 있겠는가? 미술품의 주변을 강박적으로 바장이는 고객들의 지각에 어떤 자발성이 있으며, 그(녀)의 번란한 해석으로부터 ‘그(녀)’라는 현실적 우발성을 빼고 나면 남는 게 과연 무엇인가? 그(녀)의 발걸음이 시시로 다시 찾아나서는 그 미술관이란 게 자본제적 체계의 삶 속에서 (재)배치되거나 재생산되는 시공간적 장치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인가? 미술이라는 그 과잉한 존재감 속에서, 한때 미술이라는 이름으로 분광(分光)했던 그 전위와 외부성, 저항과 무상성(無償性)은 대체 어디로 가버렸는가?

그렇기에, 오히려 역설적으로, (이를테면, 인문학과 종교와 예술의 비자본제적 연대를 위한) 새로운 영도(零度)의 체험은 미술에서부터 시작되어도 좋다. 어차피 미술의 존재감은 근본적으로 사-이-비인 게 아니던가? 영도의 체험으로서의 미술은, 그러니까 무상성과 ‘진지하지 않음 속의 진지함’과 그 비/최소 존재의 체험은, 마치 신화 속의 그 좁은 문처럼 영도의 인문(人紋)을 부사적으로 개시(開始)한다. 영도의 체험은 말하자면 태우고 사르는 일이다. 그래서, 이 사-이-비들을 불사르고 태워 그 재로 덮힌 폐허를 공들여 다시 얻는 일이다. 일종의 공득(空得)을 통해서만 가능해지는 부사적 명멸, 그 편의(偏倚)다. “사진이 되기를 갈망하는 예술”(S, 손탁)이거나 ‘물신화한 스펙타클’(기 드보르)이거나 ‘상품전시공간의 판타즈마고리아’(벤야민)이거나 ‘자기변주/자기차이화의 시뮬라크르’(보드리야르)이거나를 막론하고, 그 모든 친자본제적 성취를 바닥으로부터 갈라놓는 비존재의 틈새를 타고 올라, 쪼개고 무너뜨리고 불태우고 재로 만들어 폐허의 지평을 얻는 체험, 그리고 그 폐허의 눈높이에서 인간의 결과 무늬를 다시 살피고 톺아보는 체험을, 그 영도의 체험이 있어야만 가능해지는 것을, 나는 그것을 다시 ‘미술’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영도의 체험을 미술적, 혹은 인문(학)적 행위의 사북이자 알짬으로 내세우려는 것은 과연 자연스러운 게 아닐지도 모른다. 어차피 세속이라는 삶의 조건을 염두에 둔다면, 차라리 그것은 일종의 윤리적 요청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변화의 시작은 늘 자연화된 기성(旣成)에 대한 탈이데올로기적 노동이 아니었던가. 새로운 자연(성)을 찾는 노동은 바로 그 영도의 가능성 덕에 늘 혁명적이었으므로, 스스로를 해체하고 불태워 폐허에 이르는 데까지 나아가는 그 윤리적 일관성과 이를 통해 얻은 외부성으로 인해 감히 혁명적이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바로 그것이 비/최소 존재의 혁명이며 이른바 ‘부재의 급진성’(동무론493이하)이 아닐까?

1)다음 책의 16장~19장을 참고할 것. 김영민, <동무론: 인문연대의 미래형식> (한겨레출판, 2008). 이후 본문 속에서는 ‘동무론’으로 약칭.

<Contemporary Art Journal>(2012, 8호)

by 우듬지 | 2012/01/21 15:28 | 기본테마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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