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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력과 보상

기억력과 보상



마음속에서 정보를 유지하는 능력을 기억력이라고 한다.

학문, 예술, 스포츠 등 인간 삶과 관련된 모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위해 가장 필요한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많은 과학자들이 이 기억력을 높이기 위한 방안을 연구해왔다. 그러나 충분한 수면과 휴식을 취한다든지, 적극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든지 하는 등의 충고 수준에 머물렀다. 이런 문제를 최근 뇌과학자들이 해결하고 있다.

쥐의 기억력을 테스트하기 위해 설치한 미로. 먹이가 있는 장소에 더 많은 음식 알갱이를 놓았ⓒ

쥐의 기억력을 테스트하기 위해 설치한 미로. 먹이가 있는 장소에 더 많은 음식 알갱이를 놓았을 때 쥐들이 매우 뛰어난 기억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억력과 보상과의 상관관계를 말해주고 있다. ⓒwikipedia

NERF, 보상‧기억력 역학관계 밝혀내 

지난달 30일 과학 뉴스 사이트인 ‘유레카얼럿(EurekAlert)’에 따르면 벨기에 플랑드르 뇌전자공학연구소(NERF) 과학자들이 새로운 사실을 밝혀냈다.

‘강력한 요구와 보상(highly demanding rewarding)’에 대한 경험이 기억력 강화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것.

그동안 기억력을 상승시키는 요인으로 수면, 휴식 등 여러 가지 건강요법들이 제시돼왔다. 그러나 뇌세포 안에서 ‘강력한 요구와 보상’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다는 기억 메커니즘이 밝혀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사람을 포함한 동물들은 공통적인 기억 메커니즘을 운용하고 있다. 어떤 체험을 할 경우 그 중요도를 판단해 기억을 하거나 잊어버리게 된다.

NERF 연구팀이 밝혀낸 것은 보상심리와 기억력 간의 상관관계다.

연구에 참여한 파비안 클로스터만(Fabian Kloosterman) 교수는 “쥐 실험을 통해 요구와 함께 강력한 보상이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체험을 했을 경우 기억력이 더 오랫동안 지속됐으며, 또한 더 강력히 작동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뇌과학계는 기억력 연구에 핵심이 되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밝혀냈다고 보고 있다. 또한 향후 기억력 연구에 통찰력을 부여하고, 교육계 등 관련 분야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고 있다.

관련 논문은 자연과학 분야 세계적인 과학학술지 ‘셀(cell)’ 최근호에 게재됐다. 논문 제목은 ‘Post-learning Hippocampal Replay Selectively Reinforces Spatial Memory for Highly Rewarded Locations’이다.

연구팀은 논문을 통해 무엇인가 새로운 사실에 직면했을 때 해마의 신경세포가 그 경험을 기억해 필요할 때마다 재생한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어떤 두드러진 경험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기억의 공고화(memory consolidation)‘에 이르게 되는지 밝혀지지 않고 있었지만 이번 연구를 통해 강력한 보상이 이루어질수록 기억력이 강해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도전적 상황에서 더 뛰어난 기억력 발휘 

사람 등 포유류 뇌에서 기억을 관장하고 있는 부위는 관자엽 안쪽에 있는 해마(hippocampus)다. 새로운 사실을 기억하고 학습 활동을 관장하는 중요한 기관이다.

뇌에서 신경 단위 세포가 생성되는 몇 안 되는 영역 가운데 하나로 무엇인가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새로운 경험을 통해 새로운 사실을 인식할 경우 ‘기억의 공고화 과정’을 거쳐 장기간 그 사실을 기억하게 된다.

클로스터만 교수 연구팀은 해마에서 이루어지는 이 기억의 공고화 과정이 반복적인 경험뿐만 아니라 또 다른 요인에 의해 강화되고 있다고 판단했다.

특히 기억력이 긍정적인 보상 효과와 큰 관련이 있다고 보고, 쥐 실험을 시도했다.

먼저 미로 속에 있는 쥐들에게 두 가지 먹이 환경을 부여했다.  9개의 음식 알갱이와 1개의 음식 알갱이가 놓여 있는 장소를 제공한 후 이 장소를 알고 있는 쥐들이 어떤 장소를 더 잘 기억하고 있는지 관찰했다.

그리고 9개의 음식 알갱이가 있는 장소를 훨씬 더 잘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연구팀은 쥐의 기억력이 어느 정도에 도달할 수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 매우 찾기 어려운 미로를 설정하고 먹이가 있는 장소에 9개의 음식 알갱이를 놓은 후 이 장소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쥐들이 어떻게 먹이를 찾아가는지 관찰했다. 그러자 예상하기 힘든 강력한 기억력을 발동하며 먹이가 있는 장소를 찾아내고 있었다.

연구에 참여한 프레데릭 미콘(Frédéric Michon) 박사는 “찾아가기 힘든 매우 복잡한 장소인데도 불구하고 쥐들이 강력한 기억력을 발동해 그것을 찾아들어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박사는 “실험 결과에 비추어 강력한 보상 시스템 또한 강력한 기억력을 발휘하고 있으며, 도전적인 상황일수록 더 높은 기억력을 발휘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실험 결과를 토대로 연구팀은 해마의 기억재생 과정이 보상과 관련돼 있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 있었다.

강력한 보상이 주어질수록 기억력이 더 강화되고, 또한 모험을 감수해야 할 도전적인 상황에서도 그 일을 수행하게 된다는 것. NERF 연구팀은 현재 보상 시스템과 해마 신경세포 간의 연관 관계를 추적하고 있는 중이다.

그동안 과학자들은 기억력의 차이가 체험이 해마 신경세포에 어느 정도 각인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판단해왔다.

NERF의 이번 연구 결과는 기억의 각인 과정에서 ‘강력한 요구와 보상’ 체계가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으로 향후 교육을 비롯한 관련 분야에 폭넓은 통찰력을 부여할 것으로 보인다.

by 우듬지 | 2019/05/20 14:44 | 자연과학 | 트랙백

막스 플랑크

1877년 어느 날, 젊은 학생 한 명이 뮌헨대학의 물리학 교수 필립 폰 욜리의 방문을 두드렸다. 열역학 이론을 전공하는 그 학생은 박사 학위에 대한 상담을 위해 욜리 교수를 찾아온 것이었다. 지도 교수였던 욜리는 그 학생에게 전공을 바꿀 것을 권했다.

열역학의 기본 원리들이 이미 거의 모두 발견되었으니 앞으로 더 이상 연구할 만한 주제가 없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나 그 학생은 지도 교수의 충고를 무시했다. 심지어 그는 다음 해에 베를린대학으로 아예 옮겨 버렸다.

그곳에서 헬름홀츠와 키르히호프 교수의 가르침을 받은 그는 1879년 6월 열역학에 관한 논문으로 당당히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학생이 바로 양자가설을 발표해 근대 물리학의 새로운 전기를 가져온 독일의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다.

양자이론을 제안하고 발전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1918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막스 플랑크. ⓒ German Federal Archive

양자이론을 제안하고 발전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1918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막스 플랑크. ⓒ German Federal Archive

막스 플랑크는 1858년 4월 23일 독일의 북부 지방인 키일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키일대학의 헌법학 교수로서, 독일의 민법을 만드는 데 참여한 적이 있다. 학창 시절 모든 과목을 골고루 잘했던 플랑크는 특히 음악을 매우 좋아했다.

유명한 물리학자가 된 후에도 그는 매일 피아노를 치며 휴식을 취했으며, 특히 슈베르트와 브람스의 작품을 즐겼다. 한때 피아니스트를 꿈꾸기도 했던 그는 김나지움을 졸업한 후 대학에 진학할 때 많은 고민 끝에 물리학을 선택했다. 물리학이야말로 자신의 독창성을 가장 잘 펼쳐 보일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자신의 고집대로 박사학위를 받은 플랑크는 교수자격시험을 통과한 뒤 뮌헨대학의 객원강사가 되었다. 1885년 키일대학의 수리물리학 부교수로 임명되었으며, 1888년에는 베를린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스승이었던 키르히호프가 세상을 떠나자 후임으로 임명된 것이다.

포괄적 흑체복사 설명 위해 가설 발표

1894년에는 헬름홀츠마저 세상을 떠났는데, 이 무렵부터 그는 흑체 복사 연구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흑체란 빛을 접할 때 반사하지 않고 100%를 흡수하는 물체다. 어떤 물체도 완벽하게 흑체일 수는 없는데, 블랙홀이 그중 가장 완벽에 가까운 흑체로 여겨진다.

그런데 흑체를 이용해 연구하면 일정한 온도의 물체가 방출하는 복사열을 정밀하게 측정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당시 전기공업을 선도하고 있던 독일은 미국에서 에디슨이 백열등을 발명하자 그에 대응하기 위한 기초과학의 개발이 시급했다.

특히 전등의 필라멘트 색깔이 온도에 따라 왜 변화하며 어떤 경우에 최대의 에너지를 낼 수 있는지가 중대한 관심사였다. 그 같은 기초과학 연구를 위해 독일은 1887년에 제국물리기술연구소(PTR)를 설립하기까지 했다.

선수를 친 것은 헬름홀츠의 조수로서 열복사에 대한 연구를 이어오던 PTR 소속의 빌헬름 빈이었다. 그는 흑체를 가지고 다양한 실험을 수행해 1893년 복사의 변위법칙을, 1896년에는 복사의 분포식을 발표했다. 그런데 빈이 발표한 법칙은 짧은 파장의 빛만 설명할 수 있었고 긴 파장의 빛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1900년에 영국의 물리학자 레일리가 긴 파장의 빛을 설명할 수 있는 법칙을 발표했는데, 이후 이 법칙은 더욱 체계화돼 ‘레일리-진스 복사 법칙’으로 불리었다. 하지만 두 법칙 모두 각자의 영역만 설명할 수 있을 뿐 짧은 파장과 긴 파장 전체를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1900년 12월에 플랑크는 매우 특별한 가설을 발표했다. 빛의 에너지가 연속적인 값이 아니라 일정한 단위의 덩어리로 구성되어 있을 수도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는 파장의 크기에 관계없이 모든 영역에 적용할 수 있는 ‘플랑크 상수’의 관계식도 함께 발표했다.

그의 가설은 혁명적인 제안이었다. 에너지가 연속적인 값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은 빛이 파동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선 빛이 작은 에너지 덩어리의 모임, 즉 입자여야 했다.

독일 과학 발전 위해 나치 정권에 협조

하지만 당시엔 플랑크 자신도 이에 대한 정확한 개념이 없었으며, 고전 물리학으로 설명이 가능할 것으로 생각했을 뿐이다. 1905년에 아인슈타인이 발표한 광양자설은 플랑크의 가설을 뒷받침해주는 유력한 이론이 되었다. 아인슈타인은 이 가설에서 빛이 에너지 덩어리로 구성되어 있다고 본 것이다.

이후 보어가 제안한 원자 모형에서도 플랑크의 양자가설이 사용되었으며, 미국 물리학자 콤프턴은 1923년에 빛을 입자로 간주한 콤프턴 효과를 발표했다. 그리고 1926년에는 하이젠베르크와 슈뢰딩거가 양자현상을 설명하는 이론을 발표함으로써 마침내 양자이론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함께 현대 물리학의 양대 산맥을 이루게 되었다.

막스 플랑크는 양자이론을 제안하고 발전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1918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이후 그는 독일 전역에서 강연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는데, 이와 관련해 그의 운전기사가 피곤해 하는 플랑크를 대신해 강연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막스 플랑크는 과학 업적뿐만 아니라 그의 훌륭한 개인적 자질 때문에 동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특히 그는 히틀러가 집권한 이후 유대인 정책을 반대했지만 독일의 과학 발전을 위해 정권에 적극 협력하며 조국을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가정사는 매우 비극적이었다. 그는 슬하에 두 아들과 쌍둥이 딸을 두었는데, 장남은 1916년에 전사했다. 그리고 쌍둥이 딸은 1917년과 1919년에 차례로 사망했으며, 작은 아들은 히틀러의 목숨을 노린 사건에 연루되어 1945년 게슈타포에 의해 처형됐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플랑크는 미군에 의해 부인과 함께 괴팅겐으로 옮겨진 다음 1947년 89세를 일기로 그곳에서 사망했다. 그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독일 정부는 카이저빌헬름협회의 이름을 막스플랑크협회로 바꾸었으며, 막스플랑크연구소는 일체 간섭을 하지 않는 운영 철학으로 세계 최다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연구기관으로 우뚝 섰다.

by 우듬지 | 2019/05/16 08:07 | 자연과학 | 트랙백

정태춘


 
 
▲ 정태춘 소개서

일천 번의 노래

사람에게 있어 가장 발달된 감각이 시각이라는 건 직립이 가져온 결과이겠지만, 사람의 기억을 일깨우는데 있어 월등하게 작용하는 감각은 시각이기보다는 청각이요 후각이다. 가끔씩 청각과 후각이 작동하는 느낌의 강렬함에 맞닥뜨리면 인간은 역시 진화의 산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청각과 후각은 인간의 감각이라기보다는 동물의 감각이기 때문이다.

길을 걷다가, 어딘가에 앉아 사람들과 노닥이다가 무방비 상태에서 접하게 되는 특정한 소리나 냄새는 우리를 사정없이 낚아채 순식간에 과거의 어떤 시절, 어떤 장소, 어떤 사람들에게로 데려간다. 그것이 음악이라면, 게다가 노래라면, 그것은 시절과 장소, 사람들뿐 아니라 당시의 느낌과 감정까지도 소름 끼치게 재현한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사람들은 그것을 일러 ‘추억의 노래’라 말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추억 그 이상의 무엇이다.

노래 하나를 일천 번쯤 들으면 저절로 노래하는 사람을 알게 된다. 「북한강에서」라는 제목이 붙은 노래를 천 번도 넘게 들으며, 나는 정태춘이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다. 80년대가 절반을 넘어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던 때, 아스팔트를 뜨겁게 달구었던 저항과 열망은 곧 좌절과 탄식으로 바뀔 참이었고, 수많은 학생들과 노동자들이 분신과 투신, 고문과 저격, 그리고 의문사로 희생되던 때였다. 나는 끈 떨어진 가방처럼 고립된 채 어느 책방인가에 숨어서 하필이면 그 노래를 듣고 또 들었다. 낡은 카세트라디오에서 수없이 돌고 돌던 카세트 테이프가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늘어져버리면 다시 새 테이프로 갈아 대어가면서 말이다.

   
▲ 정태춘 5집 북한강에서

새벽강과 안개에 대한 이야기

전자오르간이 짚어내는 단선의 음을 깔고 기타줄이 뚱겨내는 청아하고 유려한 전주곡이 조용히 울려나오면 책읽기를 멈추고, 밥먹기를 멈추고, ‘저 어두운 밤하늘에 가득 덮인 먹구름’을 불러내는 그의 목소리가 읊조리는 새벽강과 안개에 대한 이야기를 숨죽여 들었다. 그건 ‘노래’라기보다는 ‘시’였고, ‘시’라기보다는 ‘이야기’였다. 누군가에게 들려주는 자신의 이야기, 그 이야기를 통해 그의 외로움과 그의 번민과 그의 깨우침이 전해지고, ‘강물 속으로 또 강물이 흐르고’, ‘내 맘 속엔 또 내가 서로 부딪히며 흘러가듯’ 주술처럼 전이가 일어나는 것을 느끼곤 했었다.

거리는 매일처럼 사람들의 함성과 오장육부를 질식시키는 최루탄과 페퍼포그의 연기로 뒤덮이고, 나는 여덟 평 남짓한 책방에서 책을 팔고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노래를 들었고 한번도 본 적 없는 새벽강을 생각했다. 체포와 투옥을 두려워 않고, 분신과 투신을 기꺼운 운명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에 의해 매일매일 세상이 뒤바뀌어가는 소식을 들으며 ‘흘러가도 또 오는 시간’과 ‘언제나 새로운 강물’처럼 새벽강을 뒤덮은 안개가 천천히 걷히어 가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다.

「북한강에서」였다. 그 노래를 듣게 되면 마치 강한 전류에 감전이라도 된 듯 일순 모든 것이 정지한다. 사람들을 조이고 얽어맸던 그물이 일시에 터쳐나가듯 의기가 분출하는 세상의 한 복판에서 튕겨져 나와 머무르던 여덞 평의 작은 책방과, 홀로 견디어야 했던 그 유폐된 시간의 재현이다. 하지만 그 재현에 대한 반응이 그토록 강렬한 것은 그것이 단순한 현장감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다. 그것은 하나의 기준점과도 같은 것이어서 그저 회상에 머무르지 않고 거기에서 얼마나 멀리에 와있는가에 대한 생각, 말하자면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는 복기의 기제로 작동하는 것이다.

「북한강에서」라는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정태춘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가 「시인의 마을」과 「촛불」 같은 여러 히트곡을 가진 유명한 가수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지만, 「북한강에서」를 들으며 내가 알게 된 사람은 그 노래를 하는 사람일 뿐, 정태춘이라는 구체적인 인물은 아니었던 듯하다. 납득이 잘 안되는 일이지만 그렇게 사고가 분절되어있다는 사실은 그를 직접 보고서야 알게 되었다.

정태춘을 보면

그를 처음 직접 본 것은 배 안에서였다. 아마도 2000년대 초입, 인천연안부두에서 제주로 가는 청해진인가 장보고인가 하는 이름을 가졌던 배, 세기적 참사로 우리에게 각인된 인천-제주 여객선의 이름이 아직은 세월호가 아니었던 때다. 어린 아들을 앞세우고 처음으로 떠난 새해여행이었다. 어느 신문사에서 주관한 새해맞이 한라산 등정 프로그램 중에 제주로 가는 배 안에서 정태춘과의 만남이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미 어두워진 부두에 정박해있는 배는, 시커먼 배를 열고 줄지어 들어서는 화물차들을 꿀떡꿀떡 삼키고있었고, 바로 옆에는 중국 가는 배 동방명주가 위압적인 크기로 우리가 타고갈 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거기 동방명주의 존재는 한중수교의 실제 현장을 목격한 느낌을 불러왔는데, 북미수교가 없는 한중수교에 대해 갖고있던 문제의식으로 하여 저물어가는 세모의 심사를 더욱 착잡하게 만들었다. 칸막이 없이 왕창 하나로 트여있는 넓고 넓은 객실에 선참으로 자리잡은 승객들은 벌써 소주병과 화투쪽들을 펼쳐놓고 있었고, 아이는 자리를 잡기가 무섭게 또 책을 꺼내어 펼쳐 들고 있었다.

TV나 잡지 같은 데서 그의 얼굴을 보고는 “저 아저씨, 쳐진 눈꼬리만 아니라면 영락없이 ‘이중섭의 소’를 닮았군” 하고 생각했었지만, 직접 본 그의 얼굴은 그렇게 투박하지도, 그렇게 수더분하지도 않았다. 별로 꾸미지는 않았어도 그는 연예인답게 끼끗했고, 유명인다운 틀을 지니고 있었다.

10년 이상 저쪽의 일이라고는 하지만, 그의 음성을 직접 들으면서도 오랫동안 그토록 몰입했었던 「북한강에서」를 떠올리지 못했고, 거기서 그가 무슨 노래를 불렀었는지도 지금은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그가 했던 동방명주 중국 가는 배에 대한 이야기를 기억하는 것은 나 역시 동방명주에 주목한 사람 중 하나였기 때문일 것이다. 스타는 무대에서만 볼 수 있듯이 그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진달래 대피소에서 백록담까지, 걷지도 못해 기어서야 갈 정도로 세찬 눈폭풍 속에서 비로소 그가 바로 「북한강에서」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다.

   
▲ 정태춘 9집 5.18 수록

정태춘의 노래 「5.18」

그는 좋은 노래를 참으로 많이 만들고 불렀다. 특히 내가 좋아할 만한 노래를 말이다. 한번 늘어놓아볼까? 「사망부가」, 「얘기」, 「떠나가는 배」, 「서울의 달」, 「장서방네 노을」, 「들 가운데서」, 「실향가」, 「고향집 가세」, 「아 대한민국」, 「저 들에 불을 놓아」, 「92년 장마 종로에서」, 「가을은 어디」, 「건너간다」,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 놀라운 일이다. 이것들이 모두 한 가수의 노래이고 모두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노래들이다. 믿기 어렵지만 그러고도 아직 남았다. 「5.18」이다.

「5.18」은 노래제목이다. 정태춘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정태춘의 「5.18」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니 정태춘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이다. 「5.18」을 모르고 정태춘을 안다고 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이 나의 생각이다. 「북한강에서」 이후 그의 노래를 수많이 듣고 좋아하는 노래의 목록에 올렸지만 나의 관심은 그저 노래에 머물러있었다. 내가 마침내 ‘「정태춘」이라는 사람’에 주목하게 된 것, 그것이 「5.18」이다.

그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세상이 움직임을 멈추고 시간마저 정지한 듯하던 전율을 잊지 못한다. 멀리서 사이렌이 울린다. 심상치 않은 소리, 불안감이 시작된다. 현악기의 낮고 둔중한 음률과 함께 점점 커져가는 군화발 소리, 헬리콥터 소리, 삽시간에 가슴 떨리는 긴장감으로 가득 찬 공간으로 노래소리가 울려 나온다.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의지를 배반하는 조건반사처럼 그냥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노래는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인데. 노래가 다 끝날 때까지, 노래가 끝나고도 한동안, 숨도 쉴 수 없었다. 정태춘에 대한 탐구는 거기에서 시작되었다.

「5.18」을 그냥 ‘노래’라고 한다면 매우 아수한 일이 될 것이다. 그 노래는 현장의 살벌함을 재현하는 거친 음향과, 가난한 유랑극단의 천막극장을 떠올리게 하는 아코디언의 처연한 음률과, 통곡과 절규를 연상케 하는 배경노래와, 그리고 평소보다 높은 옥타브로 혼을 바쳐 부르는 듯한 그의 목소리가 어우러져 완성된 장중하고도 아름다운 음악이다.

그 노래의 심장을 두드리는 가사와 묵직하고도 비장한 선율은 지금도 거대한 부채로 남아있는 참혹한 역사적 현장에 대한 뚜렷한 사진이고, 소름 끼치도록 사실적인 영화이며, 여전히 부채를 청산하지 못하고 있는 지금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그것은 1980년 5월 18일 그 역사적 시간으로부터 현재까지 본질적으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우리들의 시대에 대한 장엄한 한 편의 서사이며, 그것은 실로 오월에 바쳐진 수많은 시와 글과 사진과 영화들을 아우르는 정점에 우뚝한 헌사이다. 그래서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 마라’는 그의 호소는 아직도 유효한 것이다.

   
▲ 대추리 싸움에서 연행되는 정태춘(노순택)

대추리, 도두리, 캘리포니아 딱지

이런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정태춘은 누구인가? 나는 그의 본래 모습을 2천년대 초중반에 걸친 대추리 싸움에서 보았다. 그가 사전심의제도 폐지운동에서 선봉에 서있었다는 것은 많이 알려져 있지만, 그가 평택미군기지 확장을 저지하기 위한 피 터지는 싸움의 현장에 그 땅에서 쫓겨나는 농민들과 함께 있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대추리 싸움’, 5.18 이후 또다시 군대가 민간인을 때려잡은 싸움, 2003년에 시작되어 2006년, 그것도 하필이면 5월, 대추리 분교를 지키는 200여명의 학생들과 농민들을 피투성이로 만든 ‘여명의 황새울작전’이라는 강제진압으로 일단락된 미군기지확장 저지투쟁이다. 일제 때 들어선 비행장에 1차로 쫓겨나고, 그들과 바톤터치로 들어온 미군기지에 2차로 쫓겨나고, 그 미군기지 확장에 내몰려 3차로 대를 이어 쫓겨나는 농민들이, 평생을 미군부대 철조망 안을 흘깃거리며 미군 워커짝에 붙은 껌처럼 주인이 뒤바뀐 세상을 살아왔던 사람들이 마침내 일어서 그 땅을 지키기 위한 싸움에 온 몸을 던진 것이다. 거기에 정태춘이 있었다.

미군에 점령되어 캘리포니아. USA.로 주소마저 바뀐 대추리 도두리, 그 땅은 정태춘의 고향이다. 태어나 자란 고향일 뿐 아니라 「고향」, 「실향가」, 「고향집 가세」, 「사망부가」, 「얘기」, 등등, 거론 불가하게도 그의 노래에 숱하게 담긴 고향 이야기를 빚어낸 그의 음악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의 노래들을 듣다 보면 그가 지닌 감성이 얼마나 섬세한 것인지, 그가 간직한 고향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깊은 것인지, 그가 고향마을 사람들에게 품은 연민이 얼마나 애틋한 것인지 다 알아진다. 그가 우리에게 건네는 고향에 대한 이야기들은 섬세한 눈과, 깊은 애정과, 묵직한 사색이 없이는 세상에 나올 수 없는 것들이다.

   
▲ 대추리 진압현장 (동영상에서 채록)

정태춘 음악의 뿌리는

그는 1992년에 벌써 제 고향의 앞날을 예견했었나 보다. 「정태춘2」라는 제목을 단 책이 있다. 그는 마치 위인전처럼 제 이름을 제목으로 올린 책을 두 권이나 갖고 있는 특이 인물이다.  그 책 막바지에 「도두리의 봄」이라는 시가 있다. 그는 거기에서 고향의 몰락과 사람들의 실종을, 떼어낼 수 없는 파편처럼 박혀버린 고향의 풍경들을, 늙은이처럼 기나긴 사설로 풀어놓는다. “경기도 평택군 팽성면 도두리 음, 거긴 이제 내 고향이 아냐, … 거긴 이제 절대로 내 고향이 아니야” 하면서 말이다. 그 이야기에 빠져들며 비로소 오랫동안 가져왔던 궁금증에 답이 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 궁금증이란 이런 거다. 그는 일찍부터 ‘우리 것’에 천착해왔다. 그것은 몇몇 음악인들이 시도하는 실험적인 것과는 다르게 아주 단단하게 뿌리내린 민족의식의 발현으로 보여졌는데, 그 연원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가 나고 자란 산천과 가족과 이웃들, 한마디로 께께 촌구석 ‘고향’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의 우리 것에 대한 천착이 사회의 모순과 나라의 분단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발전해간 모든 경로가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졌다.

노래 잘 만드는 작곡가도 많고, 가사 잘 쓰는 작가도 많고, 노래 잘 부르는 가수도 많지만, 그의 노래는 어떤 것과도 다르다. 그는 사랑타령 이별타령이 아니어도 지극히 아름다운 노래들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려주었고,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공감을 이끌어내는데 노래가 얼마나 훌륭한 무기인가를 말해주었다.

「한국대중음악 명반 100」에 실린 「정태춘, 시인의 마을」 편을 쓴 필자는, ‘일본 식민지의 경험으로부터 시작해 서구 대중음악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한국 대중음악의 단절의 역사’를 거론하며 그의 음악에 대해 이렇게 서술한다.

그것은 70년대 대학 청년문화의 자장에서 서구의 포크 음악을 쫓아 성장한 ‘통기타 포크’와는 다른 배경에서 탄생한 산물이었으며, 한국에서 탄생하지 않았던 포크란 장르에 어떻게 한국적 감성을 결합할 것인가에 대한 최초의 의미 있는 음악적 성과 중 하나….(중략)

제3세계에서 어쿠스틱 기타 연주와 깊이 있는 가사 등으로 대변되는 장르∙스타일로서의 ‘컨템포러리 포크(Contemporary Folk)’와 전통적인 뿌리를 지닌 민속 음악으로서의 ‘포크’가 한 음악가에 의해 결합되는 순간…(중략)

한국 민요의 단순한 리메이크나 국악기의 활용 등 단편적으로 만들어진 ‘한국적 대중음악’과는 다른 차원의 울림을 전달하는 지점…(중략)

전문용어 때문에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지만, 이 글의 필자도 정태춘 음악에 대해 나와 비슷한 견해를 갖고있는 듯하다. 글의 필자는 정태춘의 노래하는 모양새를 ‘깊은 울림을 활용하며 흐르듯이 노랫말을 읊조리는 창법’이라고 설명하거니와, 내 귀에는 그의 노래가 우리 민요의 핵심인 메기고 받는 노동요의 모갑이 흥얼거림처럼 들리기도 하고, 상여 앞장에서 사설을 늘어놓는 상여소리꾼의 주절거림처럼 들리기도 한다. 「사망부가」에서 한 자락을 슬쩍 보여주었듯이, 그 소리들은 그에게 얼마나 익숙한 것이었을까.

마군기지확장반대팽성읍대책위원회 고문

   
▲ 정태춘 시집 「노독일처」

「노독일처」라는 묘한 제목을 단 그의 시집이 있다. 뭐 ‘쭝국집 이름’이라나? 그 시집의 중반부를 넘어가면 「지 고향이 원래」 라는 시를 만나게 된다. 2003년에 쓰여진 그 시는, 그의 고향의 내력과 미군기지 철조망에 의해 잘려진 땅을 삶의 터전으로 하여 살아온 고향의 풍경들, 그리고 미군기지확장반대싸움이 막 시작되고 있는 폭풍전야와도 같은 불안감으로 가득하다.

(중략)… 참 큰일 났슈
인저 황새울 뺏겼구,
머잖아 대추리도 쫓겨나게 생겼구
담인 도두리두 멕힐지 물러유
거기가 지 고향이여유
지가 인저 돌아가서 살고싶은 고향이란 말여유, 참 …(중략)

시의 한 대목이다. 어린 아이가 막다른 골목에 몰린 듯, 바글바글 애끓는 심정이 적나라하게 배어있다. 그 시를 읽다 보면 그의 민족의식과 감정이 결코 관념이 아니라, 미군기지에 혹은 기대고, 혹은 주눅들고, 혹은 대치하며 살아온 삶 속에서 응결된 시퍼렇게 살아있는 결정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이 그가 평생을 붙들고 온 사색의 출발점인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는 고향에 빚이 많은 사람이다. 그런 고향 아니었더라면 정태춘이라는 사람이 가능했을 것인가.

새야새야 노랑새야 황새울에 앉지 마라
황새울에 네가 오면 대추리가 무너지고
대추리가 무너지면 태춘이가 울고간다.

그가 걸머진 「마군기지확장반대팽성읍대책위원회 고문」이라는 자리는 이런 노래까지 지어 부른 그가 기꺼이 받아들인 운명이었을지 모르겠다.

정태춘 음악의 고향으로

도시에서 그가 바라보는 세상도 고향에 잇닿아 있다. 도시에서의 그의 시선도 고향마을의 폐가처럼 버려진 곳, 한 줌의 빛이 그리운 곳, 고향마을 사람들을 옮겨놓은 것처럼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향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그러한 풍경을 관통하여, 그러한 풍경을 끊임없이 재생산해내는 세상의 부조리와 모순을 포착하는 지경에까지 나아간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거장이라 칭하며, 어떤 사람들은 불편해하고, 어떤 사람들은 우울해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슬픔과 분노에 젖어 들면서도 심장을 두드리는 그의 노래에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앞으로 곧장 터져 나오지 않고 어딘가 먼 후면을 때리고 비음으로 울려 나오는 듯한 어딘지 웅글은 그의 목소리, 그가 연민을 느끼는 무수한 사람들이 목에 걸리기라도 한 듯 갈라져 나오는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이다.

인디언들이 자기 땅에서 쫓겨나 ‘인디언 레저베이션’에 유폐되었듯이 정태춘 그도 고향에서 쫓겨났다. 그가 유폐된 곳은 어디일까? 아니 누구도 그를 유폐시키지 못한다. 그는 어디에서든 자유를 누리고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니까. 진정한 자유는 깊은 사색만이 가져오는 선물이며 자주적인 인간에게만 차례지는 명예다.

그의 노래를 들으면서 항상 생각했던 것이 있다. “이 사람의 고향에 한번은 꼭 가보고 싶구나.” 그의 고향에 대한 이야기는 지독하게 사실적이면서도 너무나 정답고 아름다워서 섬섬옥수로 섬세하게 그려진 한 장의 소묘를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그 소묘가 흥얼거리고 넘실거리는 음률에 실리면 그 장면을 그려낸 작가의 애틋한 마음까지도 그대로 만져지는 것이다.  

그런 그의 고향은 예사 고향이 아니다. 치열하게 시대를 풍미한 한 음악인의 혼이 태어나 성장한 곳, 훌륭한 음악을 들으며 그 음악이 태어난 장소, 그 음악이 묘사하는 현장을 보고 싶어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하루아침에 급조된 드라마 촬영지에 비기겠는가. 대추리를 점령한 미군과 그 마름들에 의해, 그는 고향을 잃었고 우리는 어쩌면 세기를 넘어 인파가 끊이지 않는 순례지가 되었을지도 모를 하나의 의미있는 장소를 잃었다.

정태춘 년대기의 대미를 상상하며

2019년은 정태춘 박은옥의 첫 등장으로부터 40년을 기념하는 전국순회 공연과 여러가지 행사가 빼곡하다. 가수는 많아도 40년을 계속 노래하는 가수는 많지 않고, 40년을 노래하는 가수는 있어도 40년을 노래를 만들고 노래를 부르는 가수는, 내가 알기론 그 뿐이다. 공연과 행사를 홍보하는 나팔들이 한사코 그를 기피해온 TV에까지 주렁주렁하니, 이런 걸 두고 사람들은 세상이 좋아졌다고 하나보다. 당자도 그렇게 여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담 넘어 뒷집의 젊은 총각 구성진 노래를 잘도 하더니
겨울이 다 가고 봄 바람 부니 새벽밥 해 먹고 머슴 가더라 <정태춘 얘기에서>

볏섬이나 나는 전토는 신작로가 되고요.
말마디나 하는 친구는 감옥소로 가고요. <현진건 고향에서>

그가 부르는 「얘기」를 들으며 나는 일제치하 ‘제기동 초가집에서 가난과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선비정신을 팔지 않은’ 현진건을 떠올렸고, 「도두리의 봄」 기나긴 시를 읽으며 「금강」의 민족시인 신동엽을 떠올렸다.

   
▲ 케테 콜비츠 <전쟁>연작의 세 번째 작품 <부모>

「우리들의 죽음」 그 처절한 이야기를 읊조리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근대 독일 민중의 고통과 몸짓을 기록한 화가 케테 콜비츠의 「부모」를 떠올렸고, 환멸의 90년대를 처연하게 묘사한 「건너간다」를 들으며 위대한 비판과 풍자로 혁명의 시대를 관통한 프랑스 민중화가 오노레 도미에의 「삼등열차」를 떠올렸다.

   
▲ 오노레 도미에 <삼등열차>

언젠가 생각했듯이, 지금도 나는 정태춘이 일련의 년대기로 기록된 평전을 가질 자격이 있는 유일한 가수라고 여긴다. 그것은 그가 단지 노래를 부르는 서비스업자가 아니라 노래를 만들어내는 제조업자이기 때문이며, 그와 그의 노래가 부단히 움직이는 시대 속에, 움츠러들었다가도 또 일어서는 민중들 속에 일관되게 서있었기 때문이다.

고향은 누구에게나 나라의 구체적 실체이다. 고향을 잃는 것은 곧 나라를 잃는 것이다. 나라를 잃고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갈 사람은 없다. 그래서 그는 시 「어머니」에서 “어머니 제겐 조국이 없어요” 라고 하소연했나 보다. 그가 잃어버린 고향은 되찾아야 할 고향이다. 그 땅의 주인은 그들이 아니라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의연히 우리이기에.

다시금 꿈틀거리는 시대의 거대한 파도가 서서히 몰려오고 있음을 그가 알아차리면 좋겠다. 「5.18」에서처럼 시대의 파도에 몸을 싣고, 그가 해왔던 그의 방식대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면 좋겠다. 그리하여 정태춘 년대기의 대미가 되찾은 고향에 대한 가슴 터지는 서정으로 넘쳐나기를. 그리하여 ‘어머니2’를 쓰기를. ‘어머니 저는 조국을 보았어요’라고 쓰기를.


출처: 통일뉴스 2019.05.09 . 주미경(농부)

by 우듬지 | 2019/05/12 03:09 | 기본테마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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