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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교와 기독교


유대교와 기독교

 

일본은 독도를 자신들의 땅이라고 우기듯이 이스라엘도 팔레스타인의 땅을 자신의 땅이라고 우긴다. 이스라엘은 특별성과 우월성을 팔레스타인의 열등성을 강조한다. 이것이 팔레스타인 땅에 대한 침략과 지배를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호와 신과의 계약으로 이스라엘이 성립되었다는 구약성서의 이야기를 그대로 인정하며 이스라엘을 특별하게 만든 것은 유대교였다고 주장한다. 반면 팔레스타인인 가나안 사람의 종교를 부도덕하고 천박하고 타락한 다신 숭배의 이교(異敎)였다고 역설한다. 본디 이 주장은 서양이 비서양을 침략할 때 쓰던 행태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침략은 서양 제국주의의 원형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문명의 전달, 문화의 전수, 참된 종교의 선교자로 가장한다. 하지만 아직도 팔레스타인의 역사를 기록한 책은 없다.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 사이 회랑(回廊)에 해당되는 팔레스타인 역시 위대한 문명이 있었다. 그 땅에 기원전 1,000년 무렵에 이스라엘이 건국되었고 기원전 6세기에 사라졌다. 그 뒤 2,600년이 지나 이스라엘이 다시 세워졌다. 하지만 긴 세월 동안 그곳에서 생활하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추방되었다.

 

구약성서를 유대민족의 역사라고 하지만, 알고 보면 대부분은 신화에 불과하다. 기원전 7세기 헤시오도스가 쓴 신통기(Theogony도 제우스를 비롯한 열한 명의 신()을 토대로 한 신화의 체계화였다. 그리스 신들은 구원의 종교가 아니라 국가종교였다. 그리스 신화의 일부는 종교적 신화이며, 나머지는 역사적 사건을 차용한 전설이었다. 최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구약성서는 대부분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점이 밝혀졌다. 바울은 신약성서27권 중 13권을 지은 성서의 완성자지만 사랑을 가르친 예수와 달리, 기독교를 강자의 종교로 바꾼 장본인이다. 해방 이후 한국 기독교가 신약성서중심으로 바뀐 것은 여러 이유가 있지만, 일제 말기 식민지 당국이 민족주의 고취를 이유로 구약성서강독을 금지하고 정교분리에 입각해 신약 4복음서만 허용했고, 일본 기독교인들도 이에 적극 동참했기 때문이다. 당시에도 구약이 사실이 아니라는 이유로 믿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바울이 로마제국의 신민임을 자랑하기 위해 이름까지 로마식으로 바꾸었고 헬라어로 신약성서를 기록했다는 점도, 친일 기독교인들에게는 일본어 사용과 창씨개명 그리고 신사참배를 성서의 근거한 것이라고 정당화할 수 근거가 되었다.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이 서양문화의 두 기둥이라고 하지만 사실 그 둘은 침략주의와 몰살주의라는 점에서 똑 같다. 이슬라엘(모세) 그리고 그리스(아킬레스)와 로마(아이네이스)의 원주민 몰살은 서양 제국주의 모델이다. 이런 이유로 발터 벤야민은 문명의 역사는 야만의 역사라고 말했다.

 

본디 인간은 문명적 존재가 아니라 야만과 탐욕의 존재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 아니라 만물의 파괴자이고 살육자이며 특히 인간 동족의 살육자다. 구약성서의 핵심 십계명 1조는 살인하지 마라라는 것은 유대민족 내부에 적용되던 윤리였다. ‘신명기에는 유대인 노예를 7년째 해방시킨다는 것이나 과부나 고아를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도 유대인 동포에 한해서다. 하지만 노예 해방은 함무라비 법전등 고대 동양에서도 인정한 제도였다. 노예는 노동이 기본이다. ‘누구든지 일하지 않으면 먹지마라는 기독교 교리는 노동의 신성함을 강조하면서도 노예제를 인정하고 그 발전에 기여했다. 독일 나치들도 대부분 기독교도였다. 또한 남성 신체의 일부로 이브를 만들었다는 점도 여성 혐오다. 본디 대지모신의 상징이었던 뱀이 이브를 유혹하는 것도 여성 혐오의 표현이다. ‘민수기’ 21장 여호와가 독사를 보내 많은 사람이 죽는 얘기가 나온다. 모권적 가치체계에서는 영원한 생명이자 교사였던 뱀이 부권적 가치체계의 유대교에서는 악과 추의 반()가치로 전락한다. 요컨대 구약성서는 철저히 부권주의적이고 남성주의적이다.

 

호메로스의 작품보다 100년 뒤 구약성서가 온전한 형태를 갖추었다. 유대교가 시작된 것은 기원전 600년 전후이며, 그 골격을 갖춘 것은 기원후 200년경이다. 유대교의 유일신 야훼(여호와)도 중동의 많은 신 중 하나다. 유대인과 신의 성약(成約), 부활 같은 것은 조르아스터교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브(Eve) 이야기도 헤시오도스의 신통기에 가장 먼저 등장했다. 따라서 팔레스타인인이 살던 땅을 정복한 유대인들은 토지 소유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신과 성약이라는 것을 만들어냈고, 다른 신과 구별되는 유일신을 발명했을 수도 있다. 이러한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한국 기독교는 재산 축적, 권력, 출세, 사교놀이 등에 빠져 도끼 썩는 줄 모른다. 기독교도들은 대부분 기회주의적이고 출세주의자이며 권력 지향적 성향을 가졌다, 무엇보다 기독교는 제국주의와 노예제의 유지와 강화에 적극적이었다. 예수는 전쟁신인 여호와를 거부했다. 예수의 기적이나 설교가 민중을 매혹한 사실을 알리지 말라는 침묵 명령을 내렸고 자신의 처형도 예고했다. 사마리아인을 대하는 태도에서 유대교와 기독교는 갈라진다. 이단이었던 사마리아인을 유대인들은 멸시했지만, 예수는 그들에게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예수의 사랑은 공동체에서 버림받고 배제된 피차별민에게 집중되었다. 또 다른 하나는 유대교는 하늘()의 나라가 여호와가 약속한 땅이거나 재건될 다윗 왕국이었다면, 기독교는 마음의 병이 치유되어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는 사람들 그 자체다. 부모를 미워하라고 설교한 예수의 뜻은 씨족주의나 가족주의의 이기적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의미다.

 

출가한 예수는 40일 동안 사탄의 시험을 받았다. 빵과 권력의 유혹도 있었다. 하지만 예수는 권력은 사탄의 것이라고 말했다. 권력이나 국가는 사탄의 것이라는 예수의 말은 묵시록에서 거대한 괴물로 비유된다. 이처럼 예수는 어떤 권력도, 권위도, 계급도 없는 새로운 사회를 세우고자 했다. 그 사회는 부자나 기득권자는 들어갈 수 없다고 예수는 못 박았다. 누가복음에 있는 가이사(카이사르)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은 신의 나라와 지상의 국가를 엄격하게 구별하는 것이 아니고 돈으로 상징되는 황제의 권력과 하나님을 대립시킨 것이다. 예수에게 돈은 인간의 죄와 죽음을 낳는 욕망 자체이고 순종을 요구하는 권력 자체였다. 따라서 인간의 생명, 즉 삶과 죽음에 대해서는 황제에게 어떤 권한도 없었다. 황제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은 돈뿐이다. 돈은 하나님과 대립된다. 돈은 예수의 것이 아니라 악마의 것이다. 마찬가지로 황제를 숭배해서는 안 된다. 동전(銅錢)은 기술의 상징이다. 기술도 숭배해서는 안 된다. 예수는 모든 권력에 도전하고 조롱했다. 모세가 침략주의자였다면, 예수는 권력에 저항한 아나키스트(Anarchists)였다. 그러나 그는 노예제를 인정했다. 노예제 폐지에도 소극적이었다. 또한 전통 유대교처럼 노예에 노예답게, 주인은 주인답게 각자의 직분과 소명을 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예제를 적극 옹호한 바울과 베드로는 영혼과 육체를 구분하고 육체를 업신여겼다. 바울에게 육체는 유혹 앞에 무력한 죄의 실존이었기에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육체가 속죄(贖罪)된다고 주장했다. 베드로는 기독교 윤리의 본질을 권력과 제도에 대한 복종이라고 역설했다. 특히 그는 권력의 신성과 국가에 대한 신의(神意)적 국가이성을 강조해 훗날 왕권신수설과 국가신성설의 원조가 된다. 이들과는 달리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기 기독교 공산공동체는 아나키즘적이다. 사도행전2244~45절에는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다고 하듯기독교 공산주의를 실천했다. 또한 초기 기독교에서는 남녀평등이 인정되었다(로마서 161). 이러한 기독교가 기원후 313년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면서 아나키즘과는 다른 길로 걸어갔다. 국가권력과 기독교가 일치되자 엘리트들이 국가와 종교를 지배하게 되면서, 십자군전쟁 등을 통해 종교가 폭력과 야합하면서 타락하기 시작했다. 이는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중요한 도구인 국가를 신이 신성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교회는 국가를 지지해야 한다는 주장은 중세의 십자군을 비롯한 수많은 전쟁과 미국의 아랍 침략 전쟁에서도 나타났다.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는 중세의 정신세계를 지배한 자로, 그리스·로마의 고전세계에서 기독교로 전향해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융합을 보여주었다. 대표적 저서 고백록신국론은 고전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에서 국가와 국가 사이의 지배와 예속은 필연적이라고 주장해 근대 제국주의 이론의 초석을 세웠다. 또한 그는 국가 수호를 위해서는 전쟁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해 근대적 권력국가의 이념적 기초를 제공했다. 본디 초기 교회는 재산 공유와 군복무 거부, 전쟁과 무기 제작 배격, 검투법 금지 같은 반국가적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강력한 권위주의 지배체제가 유지되어야 한다고 역설했으며, 강자에 대한 약자의 예속, 현존 질서를 수호하고 복종하는 것이 평화라고 주장했다. 그는 국가주의와 권위주의의 뿌리라고 볼 수 있다. 2~3세기에서 6세기까지 로마 법학자들은 노예제가 자연과 자연법에 반하는 제도라고 주장했는데도 아우구스티누스는 노예제를 신성시했다. 인류 역사에서 고대는 착취자와 피착취자로 구성된 노예 소유자 사회였다. 기독교는 그런 사회를 비판하거나 부인하지도 않았다. 기독교보다 훨씬 앞선 불교나 유교, 그리스철학, 이슬람교도 마찬가지였다. 오랜 세월 전쟁과 살육, 제국과 식민지, 경멸과 차별 등이 종교라는 이름으로 행해졌다. 지금도 그러하다. 종교는 우월이 없다. 모든 종교가 믿는 신이 하나라면 각 종교는 지역과 시대에 따라 신을 믿는 다양한 형식에 불과하다. 따라서 자신이 믿는 종교가 탁월하다고 주장하지 말자. 어떤 종교를 믿던 사랑과 자비가 실천되어야 한다.

 

*박홍규 인문학의 거짓말2017. 인물과 사상사. pp.442-469

*2018.11.22

 

by 우듬지 | 2018/12/11 22:54 | 雜文 | 트랙백

존 내쉬

블록체인은 4차 산업혁명의 특성인 초연결과 초지능을 강화하는 핵심 기반기술이다. 그런데 블록체인에서 채굴업자, 플랫폼 사용자, 토큰 보유자 등은 중앙화된 권위에 의해 통제받지 않는다. 그럼에도 블록체인의 신뢰성이 유지되는 것은 바로 게임이론 덕분이다.

게임이론이란 각자 자신의 이익을 최대화하기 위해 경쟁할 때 최적으로 선택하는 방법을 수학적으로 분석하는 이론이다. 블록체인이라는 큰 틀에서 각자 게임에 참여하고 있는 이들은 다른 참여자들의 행동을 예측해 자신의 이익을 최대화하는 방향으로 행동하게 되는데, 바로 이 같은 내쉬균형이 블록체인 플랫폼 알고리즘의 핵심이다.

게임이론의 한 형태인 ‘내쉬균형’은 존 포브스 내쉬라는 비운의 천재 수학자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이론이다. 1994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그는 2002년 개봉돼 오스카상에서 최우수작품상 등 4개 부문을 휩쓴 영화 ‘뷰티풀 마인드’의 실제 주인공으로 더욱 유명하다.

영화 '뷰티플 마인드'의 실제 주인공으로도 유명한 천재 수학자 존 내쉬.

영화 ‘뷰티풀 마인드’의 실제 주인공으로도 유명한 천재 수학자 존 내쉬. ⓒ 위키미디어(Economicforum)

존 내쉬는 1928년 6월 13일 웨스트버지니아주의 작은 마을 블루필드에서 전력회사의 엔지니어였던 아버지와 라틴어 교사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는 혼자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거나 독서를 즐기는 조용한 아이였다. 또한 학교에서는 학습지진아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공부에서도 뒤떨어졌다.

하지만 그는 수학만은 매우 좋아했다. 13살 때 E. T. 벨의 명저 ‘수학의 사람들’이라는 책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았으며, 유명한 ‘페르마의 정리’를 증명한 뒤 남모를 전율을 느끼기도 했던 것.

그런데 그가 진학한 대학은 피츠버그에 있는 카네기 공과대학(현 카네기 멜론대학)의 화학공학과였다. 엔지니어 출신인 아버지의 뒤를 잇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그는 전공을 화학으로 변경했다가 다시 수학으로 바꿔 1948년에 학사 및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논문 2편으로 내쉬균형 개념 정립

수학 박사과정을 공부하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하려던 그는 하버드대학과 프린스턴대학 두 곳에서 입학허가를 받았다. 그가 택한 곳은 컴퓨터의 아버지이자 게임이론의 창안자인 존 폰 노이만이 있던 프린스턴 수학과였다.

게임이론의 이론적 기초는 폰 노이만과 모르겐슈테른이 1944년에 공동으로 저술한 ‘게임이론과 경제행동’에서 비롯됐다. 존 내쉬 역시 프린스턴 박사학위 논문으로 ‘비협조적 게임이론’이란 27쪽짜리 논문을 1950년에 제출했다.

이 논문과 더불어 그가 ‘미국립과학원회보’에 게재한 ‘n명 게임에서의 평형점’이라는 2쪽짜리 논문 2편에 의해 게임이론의 새로운 버전인 ‘내쉬균형’의 개념이 정립됐다.

사실 폰 노이만과 모르겐슈테른이 제시한 게임이론은 주로 두 사람이 참여하는 비협조적인 제로섬 게임은 잘 설명했지만 경쟁과 협력이 혼재하는 인간 행동의 복잡한 측면을 설명하는 데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반면에 존 내쉬는 여러 사람이 참여하는 비 제로섬 게임에서도 항상 균형을 이루는 해법이 있다는 사실을 수학적으로 증명해냈다.

당시 주류 경제학자들의 주장과는 대립되는 존 내쉬의 연구 결과에 대해 폰 노이만은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내쉬균형의 개념은 갈수록 경제학뿐 아니라 사회과학, 진화생물학 등의 분야에도 적용될 만큼 영향력이 커졌다.

시카고대학의 경제학자 로저 마이어슨은 존 내쉬가 제시한 내쉬균형에 대해 “20세기에 이룬 뛰어난 지적 진전 중 하나로서 경제학과 사회과학의 기초적인 분야 어디에나 영향력을 미치고 있어 생명과학에서의 DNA 이중나선 구조 발견에 필적할 만하다”고 치하할 정도였다.

1951년 23세의 나이로 MIT(메사추세츠 공과대학) 교수가 된 존 내쉬는 1958년 수학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인 필즈상의 후보로 거론될 만큼 명성을 날렸다. 하지만 너무 젊다는 이유로 그는 필즈상을 결국 받지 못했다.

바로 그 다음해 열린 한 학회에서 리만가설에 대한 강의를 할 때부터 그는 이상한 증세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후 그의 조현병 증세는 날로 심해져 갔다. ‘신문에 나만이 해독할 수 있는 은하계의 암호가 게재됐다’고 외치는가 하면 ‘전 세계적인 평화의 왕자’ 혹은 ‘극비의 구세주적 존재’를 자처했다. 결국 그는 정신병원에 입원해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조현병 환자가 받은 노벨상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던 그는 1963년 아내와 이혼까지 하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하지만 그는 1980년대 후반 학계에 다시 등장하며 재기에 성공했다. 그의 조현병을 기적적으로 낫게 한 결정적 요인은 바로 이혼 후에도 그를 곁에서 지켜준 아내의 헌신과 수학적 재능을 인정하고 끝까지 그를 품어준 프린스턴대학의 배려심이었다.

MIT 교수 시절 제자였던 아내 알리샤는 이혼 후 1970년부터 동거인 형태로 함께 지내면서 그의 치료에 도움을 주었다. 또한 모교인 프린스턴대학은 의식주 걱정 없이 교내에서 연구생활을 하며 그를 자유롭게 지낼 수 있게 해주었다.

1994년 노벨위원회는 폰 노이만과 모르겐슈테른의 논문 발표 50주년을 맞아 게임이론 연구자들에게 노벨 경제학상을 주기로 의견을 모았다. 미국의 존 C. 하사니와 독일의 라인하르트 젤텐이 유력한 후보였다.

문제는 후보 중 마지막 한 명인 존 내쉬였다. 경제학자가 아닌 수학자이며 게다가 심한 조현병을 앓은 환자에게 노벨상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의견으로 인해 그해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발표는 1시간 30분이나 늦어졌다.

그런 논란 가운데서도 그는 결국 그해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완전히 재기한 그는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의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는 편미분방정식 분야에서 획기적 기여를 한 공로로 2015년에는 수학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아벨상의 공동 수상자로도 선정됐다.

하지만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한 그의 운명은 거기까지였다. 2015년 5월 23일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아벨상을 받고 귀국해 자신이 살던 프린스턴타운십으로 택시를 타고 가던 중 교통사고로 인해 존 내쉬 부부는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당시 그와 함께 공동으로 아벨상을 받은 수학자 루이스 니렌버그는 “존 내쉬는 진정으로 위대한 수학자이자 천재였다”며 고인을 추모했다.

by 우듬지 | 2018/12/06 05:32 | 자연과학 | 트랙백

고대 그리스와 아테네 민주주의

 

고대 그리스와 아테네 민주주의

 

1. 고대 그리스

 

그리스는 기원전 205년 로마에 정복된 뒤 여러 나라의 식민지를 거쳐 1830년에야 독립했다. 그 뒤에도 공화국과 왕정 그리고 쿠데타를 거치다가 1973년 군주제를 폐지했다.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이 서양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서양인들은 고대 그리스가 자기들의 역사이자 선조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서양인의 그리스 도착증은 19세기 유럽 문명의 독자성을 강조하기 위해 날조된 것이다. 유럽 문명의 뿌리가 그들이 침략했던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있음을 부정하기 위해서 이집트인, 수메르인, 셈족을 백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오직 그리스인에게만 초점을 맞춘다. 그것이 아리아인 신화다. 아리안인은 고대 코커서스인을 말한다.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에 있는 코커서스 산맥에 살던 부족에서 유래된 사람들로 그들이 사용한 말을 인도-유럽어라고 부른다.

 

19세기 날조가 있기 전에는 그리스 문화가 이집트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헤로도토스, 히포크라테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도 그것을 인정했다. 플라톤의 국가는 이집트의 문헌들을 베낀 것이다. 마르크스가 지적하듯이 국가의 계급 사상은 이집트의 계급 사상을 재현한 것에 불과했다. 19세기 그리스 날조는 아리아인만이 문명을 만들었고 비백인은 어떤 문명도 만들 수 없다는 것으로 오직 자연권Natural and legal rights’으로서 백인이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독일인들은 그리스인을 가장 순수한 아리아인으로 보고 그들이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유대인의 조상인 셈족에 대한 증오로 나아갔다. 날조된 그리스에 대한 집착의 절정은 히틀러였다. 서양 제국주의의 극치가 히틀러다. 처칠이나 히틀러나 제국주의자이기는 마찬가지다. 19~20세기 서양은 제국주의 일색이었고 정치가들은 모두 제국주의자였다. 그들이 모델로 삼은 것이 그리스와 로마다. 그리스는 역사 최초의 제국주의 국가였다.

 

히틀러가 좋아한 것은 니체의 고대 그리스 사랑과 서양이 고대 그리스에서 비롯되었다는 헤겔의 주장이다. 이는 독일인의 혈통이 고대 그리스인과 관련이 있다는 의미다. 히틀러는 니체의 힘과 아름다움이라는 고대 그리스 이상을 숭상하고 부활한 것이 나치라고 주장했다. 전지전능한 초인으로 대표되는 지배 인종이 폭력과 전쟁으로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는 니체의 예언을 히틀러 자신만이 이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武力)이 나치다. 나치의 상징인 하켄크로이츠도 슐리만(H. Schliemann)이 발견했다는 고대 그리스의 유적에서 가져온 것이다. 유럽은 그리스를 훔쳤다. 유럽의 박물관은 그리스에서 약탈한 장물의 창고다. 하인리히 슐리만 역시 도굴꾼이자 사기꾼이다. 그리스 사상 중 가장 비민주적인 것은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가 다수파이자 주류였다. 그들이 궤변가라고 부른 소피스트들은 상대주의적 철학에 근거해 민주주의 이념을 체현했다. 소피스트는 정의를 의견 교환과 변경과 합의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반면 플라톤은 국가에서 순수한 존재 또는 존재 자체를 관조할 수 있는 자인 철인 독재정치를 주장했다. 그리고 정치에서는 절대군주제를 이상으로, 법률에서는 사상을 통제하는 위원회제를 이상국가로 보았다.

 

유명한 극작가 중에서도 에우리피데스Euripides만 민주적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비민주적이다. 호메로스 역시 반민주적이다. 과학사학자 버널John D. BernaI플라톤이 의식적으로 착수한 작업은 세계가 변하는 것(민주정치 방향)을 막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반대로 마르크스는 철학은 세계를 변하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현대 그리스는 고대 그리스를 계승했다고 하지만 사실은 고대 그리스 멸망 후 서구는 그리스어를 망각하고 라틴어를 공통어로 사용했다. 서구의 중세는 라틴어의 중세였고 그것이 참된 서구의 시작이었다. 르네상스에 이르러 잠시 고대 그리스가 재발견되기는 했지만 그마저 17세기에 사그라졌다. 18세기 고대 그리스의 관심이 다시 일어났지만, 현대 그리스와는 전혀 무관하다. 터키 지배하에 그리스가 슬라브(Slav)화 되었기 때문이다. 박홍규는 고대 그리스는 노예제 제국주의 사회였다고 비판하고, 소크라테스 등 철학자들은 그 체제에 아부한 반민주적 철학자라고 주장한다. 그가 이런 주장을 하는 이유는 그리스 신화 자체가 계급 차별적 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신화의 일부인 일리아스오디세이아를 쓴 호메로스는 귀족주의자로서 법과 질서를 옹호했다. 일리아스에 등장하는 민주 시민 테르시테스의 항변에 오디세우스가 한 말 다수의 지배는 좋은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의 왕으로 지배하게 하라.” 호메로스를 잇는 그리스의 극작가들은 귀족주의자 혹은 보수주의자들이었다. 루이스 멈포드(L. Mumford)가 지적했듯이 고대 그리스는 예술에 지나치게 몰두해서 현실감을 잃었고, 의상·공예·제전 등 상징적인 매력에 정신이 팔려 결국 자유를 상실했다. 요컨대 그리스신화는 고전도 아니고 인문도 아니다.

 

그리스·로마 문명은 노예와 제국과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연속이었다. 그리스 노예는 백인이었으며 전쟁에서 패한 포로들이었다. 그리스신화의 헤라클레스는 괴물을 물리친 최대의 영웅이다. 여기서 괴물이란 그리스 바깥에 산다는 것으로 야만과 악과 추를, 그리스 것은 문명과 선과 미를 대표한다. 그리스는 로마를 거쳐 서양을 대표하고, ()그리스는 페르시아를 거쳐 동양과 비서양으로 확대된다. 두 세계는 지배와 피지배, 우월과 열등, 문명과 야만, 정상과 비정상으로 도식화되었다. 이러한 도식화는 세계사를 서양사 중심으로 설정하고, 비서양사를 서양의 비서양 지배사로 날조했다. 모든 신화에서 세계를 창조한 신은 지배자인 왕족을 상징하고, 영웅은 왕을 섬기는 지배계급이며, 인간은 피지배계급으로 상정한다. 노예는 인간이 아닌 괴물이다. 지배와 피지배의 계급 관계, 우월과 열등, 정상과 비정상의 관계로 도식화된다. 왕족과 귀족, 피지배계급에도 남녀의 구별이 있다. 농경 사회에서 농경의 신은 여신이었지만, 차차 남성 중심의 사회로 변화되자 여신은 남신에 의해 지배받았다. 영웅을 포함한 남성은 정신과 지성과 문명과 공적인 정치 세계에서 존재했다면, 여성은 육체와 감성과 자연과 가정 세계의 존재였다. 따라서 각각의 성은 지배와 피지배의 계급 관계, 우월과 열등의 관계, 정신과 육체의 관계로 도식화되었다. 이것이 그리스 신화의 기본구조다, 그리스 신화는 온갖 범죄와 부도덕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것은 주체와 타자의 적대적 착취 관계를 전제로 하며, 그런 관계를 정당화하고 합리화해 괴물을 희생양으로 삼아 그것을 진리인 것처럼 지속적으로 유지시킨다.

 

2. 그리스 아테네 민주주의의 종말

 

역사상 첫 민주주의는 그리스 것이 아니다.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에서도 공동 토론과 투표, 민회 등이 있었다. 페르시아에도 민주주의가 있었다. 이집트의 최고 의사 결정도 파라오의 독단이 아닌 수많은 위원회의 결정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고, 노예와 외국인 같이 비천한 자들도 고소와 항의, 시위가 가능했다. 요즘으로 말하면 비정규직이나 외국인 노동자들도 내국인(정규직)과 같은 대접을 받았다는 의미다.

 

지금까지 유럽인들은 기원전 429년 페리클레스(Perikles. 495-429)가 사망한 이후 고대 그리스가 쇠퇴했다고 보았다. 이런 관점은 19세기 제국주의 시대 유럽 역사학자들이 열강과의 경쟁에서 패배한 아테네에 매력을 느끼지 못한 결과였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Alexandros 대왕이 동방 정복을 한 뒤 그리스를 찬양하기 시작했다. 페리클레스가 죽은 뒤 그리스에서 천재나 정치적 거물이 등장하지 못한 것은 확실하지만 지도자와 민중이 그 목적을 달성했다. 지도자들은 문벌(門閥)이 아니라 민회에서 변론을 통해 정책 결정에 참여하면서 두각을 나타난 새로운 유형의 정치가였다. 특히 정치 장군들은 사라졌다. 이는 민주주의 관점에서는 바람직한 것이었다. 지배 원리가 인치에서 법치로 바뀌자 카리스마를 가진 인물이 필요가 없어졌다. 대신 전문가들이 등장했다. 이들의 등장은 아마추어리즘이라는 민주주의 원리에 어긋나는 것이었고, 후에 민주주의를 파탄시키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기원전 403년에 부활한 민주주의는 그 뒤 80년간 안정된 길을 걸었다. 국제적으로는 과거의 힘을 회복하지 못했지만 충실한 민주주의 덕분에 경제도 부흥했다. 민회의 확대는 시민의 참여를 확대시켰다. 민회에 출석하는 시민들에게 수당도 지급되었다. 그 수당에 연극 관람 수당도 포함되었다. 이 결과 연극이 성행했다. 당시 연극 관람은 민주주의에 참여하는 방식 중 하나였다. 폴리스의 존립 전제는 자치다. 자치는 폴리스의 자랑이자 다른 도시와 구별되는 특징이었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의 침략을 받은 직후, 아테네에서 민주파를 중심으로 반란이 일어났지만 그들도 기원전 322년 항복을 하자 민주주의는 종식되었다. 이때부터 참정권은 재산이 있는 시민 9,000명에게만 인정되었다. 부자정치다. 민중법원, 공무원 추천제, 복수 대표제, 공직 순환제, 민회 수당 등이 모두 폐지되었다. 사실상 기원전 322년이 민주주의가 작동된 마지막 해였다. 결국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침략이라는 외세에 의해 망한 것이다. 따라서 교과서에 나오는 그리스가 펠레폰네소스Peloponnesos 전쟁 이후에 중우(衆愚)정에 빠져 멸망했다는 설명은 옳지 않다. 요컨대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민주주의 자체의 문제 때문에 망한 것이 아니라 외세에 의해 파산했다.

 

*박홍규 인문학의 거짓말2017. 인물과 사상사. pp.239-299

*2018.11.13

by 우듬지 | 2018/12/01 18:26 | 雜文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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